올해 겨울 블록버스터급 전시회 3가지가 있는데요. 이중 하나가 오늘 소개하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입니다.
저는 얼리버드 티켓팅을 통해 전시회 오픈 첫날일 11월 30일 다녀온 '후기- 2부'진행 합니다.
|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전시회.
우리 가족은 1호 - 1보통 - 1실망으로 관람평가가 나뉘었다는... 저는 에곤실레의 에곤실레를 위한 전시회라는 생각이.
그리고 오스카 코코슈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기쁨도
오늘 리뷰는 이번 전시회 작품 중심으로 리뷰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티켓할인, 오디오가이드, 도슨트, 아트샵, 물품보관함, 전시회 구성, 주차 등 전시회 정보는 지난 포스팅 참고하세요.
| 2실 7개의 섹션 - 관람시간 2시간을 고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관 1관 1실과 2실에서 열립니다. 1실에서는 프롤로그와 1부, 2부 전시회가 2실에서는 3~5부와 에필로그가 전시됩니다.
이번 전시회 관람시간은 최소 2시간 이상 고려하셔야 합니다. 우선 관람객이 많아서 주요 작품에는 대기가 필요하고요. 좋아하는 작품들이 많다 보니 저는 2시간30분 정도 소요 되었네요.
[프롤로그] 비엔나에 분 자유의 바람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비엔나를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도시 확장 계획을 단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비엔나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꼽히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과거 예술 양식의 모방과 재현에 그쳤습니다. 기대와 실망 속에 논란의 중심이 된 대도시 비엔나에는 각종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였고, 토론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때 새로 지어진 건물에 벽화를 그리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전통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일은 클림트의 뜻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예술의 길을 탐구했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특별한 예술 운동을 시작합니다. 클림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던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클림트와 동료들이 만든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으로 이제 비엔나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곤 실레 (1890–1918) / 1918년, 종이에 석판화 / 개인 소장
비엔나 분리파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모토로 1897년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선출됐어요. 당시 비엔나 예술가들이 가장 믿고 따랐던 클림트는 많은 전시회를 열면서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1902년에는 베토벤에 경의를 표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전통을 깬 혁신의 상징이었던 베토벤을 존경했습니다.18세기 음악적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던 때, 베토벤은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감정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알프레드 롤러가 그렸습니다. 그는 포스터 역시 하나의 예술 분야로,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스터에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많습니다. 빛나는 물체를 들고 몸을 굽힌 여성은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비엔나의 새로운 빛이 되고 싶었던 비엔나 분리파의 꿈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흔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황금의 화가’라고 알고 있지만, 예술가로서 그를 설명하는 한 단어를 꼽는다면 그건 바로 ‘혁신’입니다. 초기에 클림트는 주로 전통 양식으로 작업했고, 황제로부터 상도 받으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곧 인간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주제에 주목했고,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상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비엔나의 방식으로 수용한 ***아르누보 등 다양한 예술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클림트는 외국 작품을 소개하고 활발한 전시 활동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예술을 모더니즘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실험적인 예술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혁신’을 향한 그의 열망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시장 모습과 클림트의 사진, 정말로 옛날에 클림트 도록에서 이 사진을 보고 클림트에 대한 환상이 깨진적이 있었다는... 조금은 그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을 상상하고 있었던 시절...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수도 비엔나를 대도시로 탈바꿈시킨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비엔나를 둘러싼 성벽이 철거된 자리에 생긴 커다란 대로에 오스트리아의 정치경제, 문화, 예술을 위한 수많은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비엔나로 여행을 간다면 방문해야 하는 대표적인 명소들이죠. 구스타프 클림트는 바로 이 시기, 새로 만들어진 건물을 장식하기 위한 예술가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을 위해 그린 습작입니다.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연회 장면인데요, 중앙에는 디오니소스의 조각상이 있고, 양쪽으로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왼쪽 여인은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었고, 오른쪽 여인은 월계수 관을 들고 있습니다. 디오니소스 연회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돈 연극의 기원으로 생각되었기에, 클림트는 국립극장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 지역의 소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3년경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품에 제작 시기가 쓰여 있지 않지만, 구스타프 클림트가 학생이던 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체코 모라비아에 있는 하나 지역에서 온 소녀를 그렸다. 소녀는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하나 지역 풍습을 따른 것이다. 옷과 배경을 모두 옅은 회색으로 칠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이 더욱 두드러진다. 살짝 옆을 보는 소녀의 눈길은 그녀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노인의 옆모습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6년경 카드보드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트라운 백작’이라는 제목으로도 전해지는 까닭에 주문받은 초상화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림 속 인물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옆얼굴만 보여 주는 구도 역시 평범하게 주문받아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클림트는 얼굴의 특징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도 윤곽선을 부드럽게 처리했다. 배경을 단색으로 칠해서 노인의 옆얼굴에 더욱 눈길이 머문다. 클림트가 인물화에서 새로운 구도와 효과를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모자를 쓴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7/98년 캔버스에 유화 클림트재단
작품 속 여성은 당시 비엔나에 유행하던 패션과 장신구를 보여 준다. 목을 감싼 칼라와 챙이 넓은 모자를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 여인의 얼굴이 더욱 돋보인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불편한 코르셋이나 지나친 장식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편안한 의복을 강조하는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였던 에밀리 플뢰게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예술적 동반자로서 깊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녀의 패션은 클림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풀 속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8년경 캔버스에 유화 클림트재단
세련된 모자를 쓰고 풍성한 소매가 돋보이는 블라우스를 입은 초상화 속 여인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터운 물감으로 그려낸 수풀과 여인의 블라우스 소매는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구스타프 클림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예술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과정에서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같은 화풍이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클림트도 초기에는 전통적인 화풍으로 그렸지만, 점점 인물화에서 여러 가지 구도나 표현법을 실험했습니다. 1890년대 후반에는비엔나 중.상류층 여성들의 초상화가로 자리 잡으면서, 이 작품처럼 완성도 높은 인상주의 화풍의 인물화틀 그렸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대표작품이기도 한데요. 작품 사이즈도 A4 용지정도 크리로 작고, 제가 기대한 것보다는 다소 소박한 크림트의 인물화 입니다.
클림트를 기대하고 방문했다면 실망할 전시회
뒤에도 클림트의 그림은 계속되지만 기대했던 황금빛의 클림트 그림은 이번 전시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번 전시회 제목인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뒤에 클림트는 빠져야.
1부. 비엔나 분리파, 변화의 시작
19세기 말 비엔나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변화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기득권과 맞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된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들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여 과거의 관습과 예술 양식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 된 클림트는 활발하게 전시를 열어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교류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회화뿐 아니라 공예, 삽화, 책 표지와 우표 디자인 등 일상의 여러 분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들의 예술 철학과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는 잡지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도 발행했습니다. 여러 예술 장르를 합쳐 하나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는 ‘총체예술’의 개념은 비엔나 분리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영원하지 않았던 클림트의 분리파
비엔나 분리파는 크게 두 개의 단체가 결합된 형태였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7인회’와 더 전통적인 양식을 고수했던 ‘하겐 클럽’입니다. 두 단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졌기에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1905년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의 작품 판매처로 7인회와 친분이 있는 갤러리를 활용하는 방안을 두고 형평에 어긋난다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풍경화를 주로 그리며 순수미술을 중요시한 하겐 클럽과 예술과 공예의 통합을 지향한 7인회의 서로 다른 성향으로 인한 충돌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결국 분열로 이어졌고, 클림트와 콜로만 모저, 요제프 호프만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비엔나 분리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후에도 존속하며 젊은 예술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습니다.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알프레드 롤러 (1864–1935) 1902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모토로 1897년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선출됐어요. 당시 비엔나 예술가들이 가장 믿고 따랐던 클림트는 많은 전시회를 열면서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1902년에는 베토벤에 경의를 표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전통을 깬 혁신의 상징이었던 베토벤을 존경했습니다.18세기 음악적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던 때, 베토벤은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감정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알프레드 롤러가 그렸습니다. 그는 포스터 역시 하나의 예술 분야로,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스터에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많습니다. 빛나는 물체를 들고 몸을 굽힌 여성은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루돌프 칼바흐 (1883–1932)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 안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처럼 다양한 예술장르를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1905년 클림트와 뜻을 함께한 예술가들이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했습니다. 클림트가 비엔나 분리파에 속했던 시기를 '빛나는 7년'이라고 부릅니다. 무려 23번의 전시회를 열면서 유럽의 예술가들과 왕성하게 교류를 했고,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변혁의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한 후 '클림트 그룹'을 만들어 더 급진적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전시회 포스터는 클림트 그룹이 개최한 '비엔나 예술전람회'입니다.이 전시에서 만나게 될 '꿈꾸는 예술가들'이 총출동했습니다.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디자인과 장식 예술 분야를 담당했고,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는 오스트리아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전환하는 시작점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좀 더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겠죠?
제40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른스트 에크 (1879–1941) 1912년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클림트와 동료들이 떠난 뒤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어 다양한 예술가의 작품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제40회 전시회에서는 포스터라는 장르가 독립된 예술 분야임을 강조했다. 비엔나 분리파는 서체와 그래픽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다양한 포스터를 전시했다. 에른스트 에크는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강렬하고 순수한 디자인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제14회 전시회장에서 촬영한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
모리츠 네어 (1859–1945) 1902년 사진 비엔나 이마그노 사진 기록 보관소 (크리스티안 브란트슈테터 수집)
혁신의 상징, 베토벤을 위한 전시회
비엔나 분리파는 1902년 ‘베토벤에 대한 경의’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관인 *제체시온의 중앙 전시실에는 독일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이 놓였습니다. 베토벤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중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일부를 인간의 고통과 투쟁,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여정으로 묘사한 <베토벤 프리즈>를 전시실의 세 벽면에 그렸습니다.
전시회 개막식에는 비엔나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 아래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일부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전시회의 전체 디자인은 비엔나 분리파의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습니다. 새롭고 대담한 전시회였다는 좋은 평가도 있었지만, 급진적인 시도를 어려워하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 전시회에 회화,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전시의 모든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져 특별한 감상을 선사하는 ‘총체예술’의 이상을 구현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잡지
비엔나 분리파는 미술과 문학을 아우르는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습니다. 이 잡지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 간행되면서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고 새로운 예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이 잡지는 비엔나 분리파의 초기 역사를 가장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예술가들이 돌아가며 디자인을 담당한 까닭에 누가 맡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양식의 잡지가 발간되었습니다. 이 또한 특정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을 지향했던 비엔나 분리파만의 특징이었습니다. 『성스러운 봄』은 단순한 잡지가 아니라 문학과 그림, 표지 디자인을 결합하여 비엔나 분리파가 추구했던 ‘총체예술’을 구현한 또 하나의 매체였습니다.
성스러운 봄 1호
1898년 1월 발간 오스트리아 예술가연합 활판 인쇄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6년 동안 '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어요. 이 잡지는 유럽 예술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들이 보여주려고 한 새로운 예술이 무엇인지 알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정사각형 판형으로 만들어진 '성스러운 봄'의 첫 번째 호입니다. 표지를 보시면 나무의 뿌리가 화분을 뚫고 자라나 있고, 풍성한 나무에 열매처럼 매달린 세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는 예술의 중요한 요소인 건축회화, 조각을 상징합니다. 마치 새롭게 뿌리내리는 비엔나 분리파와 성스러운 봄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성스러운 봄'은 매번 다른 예술가가 편집장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나올 때마다 각자의 색을 담은 제각각의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라틴어로 쓰인 잡지 제목 '베르사크룸'은 '성스러운 봄'이라는 의미로, 비엔나 분리파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우표를 위한 디자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기마상, 60헬러 콜로만 모저 (1868–1918)
1908년 카드보드에 연필(23), 종이에 연필(24-26), 불투명 수채 오스트리아 포스트 AG
콜로만 모저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재위 1848-1916)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디자인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98년 열린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의 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비엔나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임을 강조하기 위해 비엔나 분리파를 지지했다. 모저는 기하학적인 무늬로 우표의 테두리를 각각 다르게 디자인했다. 예술이 삶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모저의 예술적 지향을 잘 보여 주는 작업이다.
벨베데레 궁전
카를 몰 (1861–1945) 1909년경 종이에 다색 목판화 레오폴트미술관
19세기 후반 비엔나에서는 목판화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이었던 카를 몰 역시 비엔나 풍경을 담은 판화를 많이 만들었다. 이 판화는 벨베데레 궁전 정원의 겨울 풍경을 담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조각상에서 쭉 뻗은 정원 길을 따라 벨베데레 궁전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몰은 빛의 반사와 섬세한 색감을 세련되게 활용하여 겨울 분위기를 표현했다.
2부 새로운 시각, 달라진 오스트리아의 풍경
비엔나 분리파의 대다수 회원은 유럽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새로운 예술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전시회를 열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어떤 예술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그린 풍경화가 나타났습니다.
전통 양식을 따르던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탐탁치 않아 했고, 당시 유럽에 퍼져 나갔던 예술적 자극에 대한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시도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방이 아닌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예술 철학과 도전은 이후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큰 포플러 나무 11 (다가오는 폭풍)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02/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를 이끈 구스타프 클림트는 예술가들이 유럽의 다양한 미술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오스트리아 밖으로 나가서 보고 배우라고 지시했습니다. 또한 유럽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전시회를 열어 소통의 장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나 상징주의가 비엔나에 알려졌고,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은 이전과 다른 풍경화들을 그리게 됩니다..
클림트의 풍경화에서 거대한 포플러나무는 작품의 오른편을 가득 채우고 있죠. 나무를 잘 보시면 여러 가지 색 물감을 찍어서 반짝이는 효과를 냈습니다.어떤 평론가는 이것을 '마치 송어의 비늘 같다'고 말했어요. 멀리 펼쳐진 들판 너머로 하늘이 크게 그려져 있는데, 바람이 소용돌이치듯이 불고 먹구름이 져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쏟아질 것 같네요. 하늘을 극적이고 생생하게 그렸던 화가가 한 명 떠오르지 않나요?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클림트도 유럽에서 유행했던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당시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정사각형 화폭을 선택한 것도 참 클림트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숫가의 남녀
에른스트 슈퇴어 (1860–1917) 1897/19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그림 속 남녀는 호숫가 난간에 기댄 채 서로의 시선을 피해 먼 곳을 바라 보고 있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인 에른스트 슈퇴어는 이 작품에서 여러 빛깔의 색들을 섞지 않고 점을 찍어서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파란색과 연보라색 점들이 왠지 우울하고 쓸쓸한 감정을 자아낸다. 슈퇴어는 주로 희미한 저녁 빛을 표현해 서정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냥 느낌이 좋았던 작품 중 하나...
옥수수 짚이 있는 풍경
레오폴트 블라우엔슈타이너 (1880–1947) 1902/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넓게 펼쳐진 들판과 언덕을 표현한 이 그림은 레오폴트 블라우엔슈타이너의 초기 작품이다. 높이 쌓아 올린 옥수수 짚을 여러 곳에 배치해 화면을 구성했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풍경을 조화롭게 표현했다. 당시 흔했던 황토색 옥수수 짚을 소재로 수확 이후 여름날 풍경을 묘사했다. 일본 목판화와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구도와 색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충실히 반영했다.
피아노를 치는 레오폴트 치하체크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에곤 실레는 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자 삼촌인 레오폴트 치하체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작품은 실레의 삼촌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그렸다. 실레는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밝은 부분과 그림자가 있는 어두운 부분을 구분하여 명암의 대비를 살렸다.
가로로 긴 화폭 역시 극적인 구도를 만들어 준다. 붓질의 방향이 모두 빛이 들어오는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는 손으로 눈길이 간다. 실레는 삼촌의 손을 번지도록 표현하여 피아노를 치는 율동감을 살렸다.
실비아 콜러 (화가의 딸)
브론치아 콜러-피넬 (1863–1934) 1926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브론치아 콜러-피넬은 구스타프 클림트, 요제프 호프만 등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과 매우 가깝게 교류했다. 그녀의 집은 비엔나의 화가, 과학자, 음악가, 철학자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였다. 그녀는 특히 인물화와 정물화에서 독특한 색채와 구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브론치아의 딸 실비아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사랑과 헌신의 상징인 분홍 카네이션을 들고 있다.
교류와 후원, 비엔나의 카페 문화
카페는 화가, 소설가, 음악가, 건축가, 정치인 등 주요 인사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는 장소였습니다. 카페 문화는 당시 비엔나 예술계의 중심이었으며, 예술의 장르를 넘나들며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 비엔나 예술가들은 활발한 예술 후원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카페는 후원자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탐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재력가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들은 감사의 의미로 후원자의 드로잉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굽은 목재로 만든 의자, 255번
카페 뮤지엄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 아돌프 로스 (1870–1933) 제작: 야코프 & 요제프 콘 1898년경
굽은 목재, 너도밤나무에 검붉은 칠, 나무로 엮은 좌석 레오폴트미술관
여러분은 카페에 가면 무엇을 하시나요? 공부나 일을 위해 혹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가시나요? 19세기 말 비엔나에서는 이런 카페 문화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예술, 철학, 문학, 음악의 중심지 비엔나에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였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카페였어요. 그 중에서도 최고의 명소로 꼽히는 곳이 바로 카페 뮤지엄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계시는 의자는 1899년 카페 뮤지엄이 문을 열었을 때 놓여 있었던 것이에요. 이때 만들어진 카페 의자는 단순한 디자인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이 의자를 디자인한 아돌프 로스는 장식이 없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기능성을 살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카페 뮤지엄이 문을 열었을 때는 엄청난 논란이 있었다고 해요. 화려한 장식을 기대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의 디자인이 너무 무미건조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아돌프 로스의 실용성과 기능성을 강조한 디자인은 이후 모더니즘 건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드로잉 작가로, 코코슈카는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사용했으며, 수많은 전시회와 작품을 통해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파울 셰어바르트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출판사: 데어 슈투름, 베를린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독일의 소설가이자 건축 이론가 파울 셰어바르트의 초상화다. 그는 표현주의 잡지 『데어 슈투름』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특히 건축에 유리를 사용하여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리 건축 이론’을 제시해 주목받았다. 코코슈카는 다양한 굵기로 선의 강약을 조절하여 셰어바르트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헤르바르트 발덴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출판사: 데어 슈투름, 베를린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독일의 미술 비평가 헤르바르트 발덴의 초상화다. 발덴은 표현주의와 같은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지지했다. 그는 베를린에 출판사와 갤러리를 열어 새로운 예술 운동을 지원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발덴이 1910년 창간한 잡지 『데어 슈투름(Der Sturm)』은 표현주의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중요한 출판물이었다. 오스카 코코슈카 역시 이 잡지에 여러 점의 삽화를 그렸다.
콜로만 모저
콜로만 모저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만든 예술가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조각, 유리 등 다양한 방면의 디자이너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며 가구, 벽지, 도자, 직물,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모저의 디자인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부드러운 곡선과 자연스러움이 특징입니다. 또한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양식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디자인 공방을 떠난 이후로는 빛과 색을 연구한 회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했던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만능 예술가였습니다.
산맥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이 그림을 그린 콜로만 모저는 이번 전시에서 주목하는 6명의 꿈꾸는 예술가들'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로 활동하면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하고 기획했어요.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면서는 공예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죠. 공방을 나온 이후에는 회화 작업도 남겼으니, 그야말로 장르의 경계 없이 만능으로 활동했던 예술가네요
콜로만 모저는 지금 보고 계시는 것과 같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요,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여러 산을 그렸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어요. 노랗게 표현돈 하늘 아래로 몇 개의 선을 그려서 산맥을 구분하고, 열은 따란색과 어두운 색을 대비시켜서 구분했어요. 이런 단순한 구성과 색 대비는 일본 목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우키요에 라고 부르는 일본 목판화가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간결하고 단순한 구성이 선명하고 풍부한 색감은 전통적인 원근법과 사실적 표현어 익숙했던 유럽 사람들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일본 미술이 비엔나에서 새로운 표현을 탐구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빛과 색의 마법, 모저의 꽃 그림
마리골드 콜로만 모저 (1868–1918) 1909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이끈 콜로만 모저는 다양한 재질의 공예품을 만들고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수공예와 장인 정신을 내걸었던 공방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경영 방식에 대한 의견 충돌이 생겼고 결국 모저는 1907년 디자인 공방을 떠났다. 그 뒤로 모저는 회화를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하루 또는 계절에 따라 빛과 색이 달라지는 장면을 담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이후에는 강렬한 색채를 띠는 정물과 꽃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동굴 속의 비너스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동굴의 둥근 공간에서 비너스가 베일을 쓰고 나오는 장면을 그렸다. 비너스의 몸은 밝은 부분에서는 노란색을, 어두운 부분에서는 옅은 보라색을 띤다. 모저는 비너스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베일, 바위, 꽃다발 등에 흔히 쓰지 않는 색을 혼합해 사용했다. 그는 독특한 색채 대비와 상징으로 고전적 주제인 그리스·로마 신화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1914년 무렵 모저 화풍의 변화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하겐 클럽과 알빈 에거-리엔츠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가들 중 일부는 하겐 클럽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공예보다 회화와 같은 순수 미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사실적으로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이나 풍속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알빈 에거-리엔츠는 1900년까지 하겐 클럽에 소속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농민, 노동자 등 서민의 삶을 담은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표출했던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무게감 있고 따뜻한 정서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깊은 숲 (<아베>를 위한 습작)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895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희미한 빛이 어린 울창한 숲속에 침엽수가 높이 뻗어 있다. 햇빛이 스며들고는 있지만 땅에 닿지 못하기에 차가움이 느껴진다. 빠르고 자유로운 붓질로 나무 아래 우거진 덤불을 표현했다.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뾰족하게 갈라진 나뭇가지다. 앞쪽에는 밝은 색을, 뒤쪽으로 갈수록 어두운 색을 두껍게 칠해 깊이감을 주면서 햇빛이 스며드는 느낌을 나타냈다. 이 작품은 1809년 베르기젤 전투 이후 티롤 민병대가 기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베르기젤 전투 이후의 아베 마리아>의 배경을 위한 습작이다.
이상하게 이 그림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장에서 마음을 흔들었던 작품 중 하나.
점심 식사 (<수프> 두 번째 그림)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의 한 축을 이루었던 그룹은 회화나 드로잉이 공예보다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 하겐 클럽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탈퇴한 후에도, 이들은 계속 전시회를 열고 활동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풍경을 차분하고 따뜻한 정서로 다뤘던 알빈 에거-리엔츠라는 화가가 그러한 부류에 속합니다.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는 침착하고 평온하며,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어 따뜻한 분위기가 전해집니다.에거-리엔츠는 농부들의 일상을 무게감 있게 그렸는데요, 같은 주제로만 무려 25점이나 되는 그림을 남겼다고 합니요. 그만큼 이런 주제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실에서 2실로 2부에서 3부로
전시장 중간에 있는 공간에서는 이번 전시회관련 멀티미지디어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과 에곤실레 작품을 대형 현수막으로 출력한 포토월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3부. 일상을 예술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탄생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동료들은 공예도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술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서는 회화, 공예, 조각, 포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였고,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903년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의 물건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설립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초기 디자인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 미술과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 형태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강조한 영국 *예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단순함을 중시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들의 철학은 이후 기능주의를 추구하며 설립된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여러 방면의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 설립 25주년 기념 서적
마틸데 플뢰글 (1853–1958) 발리 비젤티어 (1895–1945) 구드룬 바우디슈 비트케 (1907–1982) 1928/29년
돋을새김한 종이로 겉표지를 꾸민 책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03-1928’이다. 공방과 관련된 많은 사진 자료를 포함하고 있으며, 글은 여러 가지 언어로 쓰여졌다. 이 책의 제작에는 세 명의 예술가가 참여했는데 그 중 마틸데 플뢰글의 경우 책에 수록될 사진 자료와 글을 선정했고 전반적인 디자인을 담당했다. 책에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활동한 주요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공방의 역사와 성과를 담았다.
연하장 엽서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 (1893–1971)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연대 모름 카드보드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는 새해,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을 위한 엽서도 디자인을 했습니다. 여기, 붉은 옷을 입은 광대가 꽃다발에 둘러싸인 돼지를 들고 있는 장면이 보이시나요? 우리나라에서도 돼지꿈을 꾸면 그날은 복권을 사야한다는 말이 있죠.
전통적으로 돼지는 복을 상징하는데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도 돼지는 행운을 나타내는 동물이라고 해요. 특히 새해 연하장에 시용될 때는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나타내는 동물로 쓰여서, 새해에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엽서 위에 쓰인 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입니다. 그러니까 이 엽서는 새해 연하장이에요. 광대는 새해를 갖이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어요.
커피 주전자, 톤디 커피와 홍차 식기 세트
디자인: 콜로만 모저 (1868–1918) 장식 디자인: 유타 지카 (1877–1964)
제작: 비엔나 도자기 제작소 (요제프 뵈크) 1901/02년 자기에 노란색 유약 레오폴트미술관
하얀색 바탕에 동글동글한 장식이 들어간 주황색 줄무늬 디자인이 너무 매력적이에요. 총 16점으로 이루어진 이 도자기 식기 세트는 여러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선 식기 세트의 모양은 콜로만 모저가 디자인을 했고, 주황색 장식은 콜로만 모저의 제자였던 유타 지카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도자기 제작은 도자기 공방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비엔나 도자기 제작소'에서 만들었습니다.
1부에서 설명했던 '총체예술`기억하시나요? 베토벤 전시회처럼 회화,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예술의 여러 요소들이 어우러져 관람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선사한다는 개념인데요, 일상과 예술을 통합하고, 이를 위해 모든 예술가들이 힘을 합치는 것, 이것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이 추구했던 '총체예술'의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도승의 머리
디자인: 미하엘 포볼니 (1871–1954) 제작: 비엔나 도예 공방 1906년경 도자에 유약 레오폴트미술관
1906년 도예가이자 조각가인 미하엘 포볼니는 그래픽 디자이너 베르톨트 뢰플러와 함께 ‘비엔나 도예 공방’을 설립했다. 이들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미학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함께 협력하기도 했다. 정수리 부분을 깎은 수도승 특유의 머리와 깡마른 얼굴, 움푹 들어간 눈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머리와 얼굴을 감싼 검은색 두건이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 포볼니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표현하고자 했다. 수도승은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하다.
손가방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1893–1971)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29년 천 에른스트 플로일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활동한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섬유, 금속, 도자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자이너로 두각을 드러냈다.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독특한 기하학적 무늬와 밝고 대조적인 색채의 조합으로 장식미술과 일상 용품을 결합했고, 1920년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이끌었다. 이 가방은 일상생활에서 가볍게 들기 좋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다양한 색의 동그라미 장식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형태로 표현했다.
가죽 공방의 성과, 세련된 디자인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1893–1971) 마틸데 플뢰글 (1893–1958)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29년 염색한 가죽 에른스트 플로일
1912년 디자이너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열아홉 살 이른 나이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첫 작품을 만들었다. 1920년대에는 꽃 등 식물무늬를 활용해 직물을 만들던 당대 예술가들과 달리 기하학적 구성과 대담한 색채로 눈에 띄는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크리스털 식기 세트, 메테오르 100번
네 개의 와인잔 디자인: 콜로만 모저 (1868–1918)
제작: 마이어스 네페 (바칼로비츠 & 죄네 의뢰) 1899년 주조 유리 레오폴트미술관
콜로만 모저는 일상과 예술을 통합하는 철학을 실천한 디자이너였다. 모저는 다양한 모양과 색을 활용한 유리 공예품을 섬세하게 디자인했다. 이 작품들 역시 모저가 디자인하고, ‘바칼로비츠 & 죄네’ 회사가 보헤미아의 유리 공방 ‘마이어스 네페’에 제작을 의뢰해 만들었다. 기하학적 무늬를 잘 살린 모저 특유의 디자인을 보여 준다. 특히 유리를 성형할 때 만든 동그란 무늬가 마치 물 밖으로 떠오르는 공기 방울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꽃병
디자인: 콜로만 모저 (1868–1918) 제작: 요한 뢰츠 비트베 (바칼로비츠 & 죄네 의뢰) 1900년경
유리, 페노멘 그레 장식*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만든 다양한 작품들로 가득한 공간에 오셨습니다. 1903년 설립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은 일상적인 용품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공예품들은 당시 일상에서 쓰이던 것들입니다.요즘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참 예쁘고 멋지죠? 몇 개는 집에 갖다 놓고 싶을 정도인데요?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 설립을 주도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영역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특히 공방은 디자이너, 제작사 그리고 판매사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저는 공 모양의 꽃병에 강렬한 색채로 식물무늬|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디자인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디자인은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도자기 및 유리 공방에서 꽃병으로 제작됐고,'바칼로비츠와 쇠네' 회사에서 판매했습니다. 이렇게 예술가와 제작사 간의 분업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수준 높은 공예품들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요제프 호프만
요제프 호프만은 기능주의 미학을 강조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개최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했는데, 초기에는 장식 미술에 바탕을 둔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국 예술공예운동이 추구하는 간결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매료되었고,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기하학적인 디자인에 빠져듭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생활 속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공간의 모든 요소를 일정한 디자인으로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창문, 문, 가구, 식기 세트 등을 모두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디자인했습니다. 이는 모든 요소를 통합하여 최상의 디자인 효과를 내고자 했던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총체예술’이었습니다.
안락의자 721번
비엔나 전신국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 오토 바그너 (1841–1918) 제작: 야코프 & 요제프 콘 1902년경
굽은 목재, 너도밤나무에 칠, 합판 레오폴트미술관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자 이론가로 유명한 오토 바그너가 디자인한 의자입니다. 오토 바그너는 기능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움까지 담을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자 콜로만 모저외 요제프 호프만 역시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이들은 스승의 철학을 따라 장식적이면서도 기능성 좋은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이 의자는 오토 바그너가 비엔나의 전신국 사무실을 위해 디자인한 것입니다. 팔걸이와 등받이를 하나의 나무로 만든게 보이시나요? 나무에 수증기를 쐬어 부드럽게 만든 후 원하는 모양으로 구부려 곡선을 표현한 것입니다
꽃장식 테이블, M436번
디자인: 요제프 호프만 (1870–1956)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05년경 철판에 아연 도금 후 칠 레오폴트미술관
하양고 깔끔한 꽃장식 테이블을 디자인한 사람은 비엔니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한 요제프 호프만입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창립했고,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이 테이블이 어떤 무늬로 가득 차 있는지 보이시나요?
바로 정사각형입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정사각형이 가장 완전한 형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서 있는 바닥, 주변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정사각형이 많이 보이실 거에요
요제프 호프만은 아름다움과 기능이 조화로운 수공예의 가치를 강조한 영국의 예술공예운동에 영향을 받아 정사각형에 매료되었습니다.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구성 속에 아름다움을 표현한 호프만의 디자인은 이후 많은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3부 공예관련 섹션은...
미알못인 제가 관람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많았네요. 다소 지루한 섹션이었습니다.
아는 작가도 없고, 착품에 크게 공감도 안가고.
손잡이가 있는 바구니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05년 금속에 바니시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많은 금속 공예품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다시 유행한 고전적인 공예 제작 방식을 따랐다. 바로 금속을 고온에서 녹이지 않고 실온에서 물리적인 힘을 가해 성형하거나 가공하는 방식인데, 재료 본연의 성질은 유지하면서도 모양을 변형할 수 있었다. 이 바구니 역시 실온에서 가공한 뒤 표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으로, 복잡하고 섬세한 기하학적 장식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4부 강렬한 감정, 표현주의의 개척자들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뒤로 예술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를 주변에 소개하고 후원을 받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 실레는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신예술가그룹 화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며 비엔나 예술계에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과장된 꽃과 장식적 배경
에곤 실레 (1890–1918) 1908년 캔버스에 유화, 금색과 은색 안료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가 구스타프 클림트를 처음 만났던 1907년, 실레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의 학생이었습니다. 클림트는 단번에 에곤 실레의 재능을 알아보았죠. 그가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소개해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스승이자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죠. 마침 에곤실레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지쳐 있었습니다. 결국 에곤 실레는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료 예술가들을 모아서 신예술가그룹'을 만들었어요. 신예술가그룹은 비록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인물의 감정을 미술로 나타내는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면서, 비엔나 예술계에 세다 교체를 알렸습니다.
이것은 10년 전, 구스타프 클림트가 비엔나 분리파를 만들었을 때를 상기시켜 주네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평행 이론일까요? 주황색 꽃으로 장식된 보라색 식물은 정사각형의 화폭에 그려졌습니다. 식물의 배경은 금색과 은색 안료로 장식되어있어 화려합니다. 클림트의 영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에곤 실레의 화풍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화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곤 실레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스승이었다. 당시 클림트와 실레의 특별한 관계를 눈여겨본 사람들은 실레에게 ‘은색의 클림트’, ‘충실한 추종자’와 같은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섬세하게 그려진 하얀색 국화는 비엔나 분리파가 지향한 장식 미술의 영향을 보여 준다. 공간감 없는 검은색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 국화의 구성에서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한 자포니즘과 일본 목판화의 특징이 엿보인다.
소년과 큐피드
안톤 콜리히 (1886–1950)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한 소년이 벽에 기대 서 있습니다. 사실 소년이라고 하기엔 어른에 가까운 건장한 신체와 큰 발을 가지고 있는데요. 어딘가 부끄럽고 어색한 모습입니다. 소년의 옆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신으로 나오는 큐피드가 긴 창을 들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 변화를 겪으며 사랑을 알게되는, 그야말로 성장 중인 소년을 표현했네요
이 작품을 그린 안톤 콜리히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에곤 실레와 만났고, 신예술가그룹으로 활동했습니다.
콜리히와 신예술가그룹 예술가들은 1911년 작품을 출품했고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겐 클럽은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추구하기 시작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지지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여성의 초상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 (1887–1973)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머리가 헝클어진 여인이 무심한 듯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흰 블라우스에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한 이 여인은 부유한 후원자로 추정된다.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며 감정을 담아냈다. 이 작품을 그린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는 배우이자 극작가였지만, 1910년대 초반 파리에서 미술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야수파를 비롯한 최신 예술 동향을 접한 뒤로 화가로 전향했다. 귀터슬로는 신예술가 그룹에서 에곤 실레, 안톤 파이슈타우어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푸른 옷을 입은 소녀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890–1969) 1913/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한 소녀가 허름한 벽 앞에 앉아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양팔을 맞잡은 자세는 고민에 빠져 있는 소녀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줍니다. 어두운 표정과 눈 주변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보니, 금방이라도 운 것 같습니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으니, 소녀의 슬픈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을 그린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에곤 실레와 함께 신예술가그룹을 만드는 데 함께했습니다. 이렇게 인물의 감정을 차갑게 가라앉은 색채로 그린 것은 20세기 초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입니다. 함께 전시된 신예술가그룹 작가들의 작품을 한번 둘러보세요. 인물화를 그릴 때 그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내고자 했습니다.
조용한 여성 (화가 어머니의 초상)
안톤 콜리히 (1886–1950) 1909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안톤 콜리히는 1911년 친분이 있던 예술가 단체 하겐 클럽의 전시장에서 열린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 아홉 점을 출품했다. 하겐 클럽은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추구하던 표현주의 예술을 지지하고 그들의 혁신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로 신예술가 그룹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콜리히가 당시 출품했던 아홉 점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어머니의 초상화다. 어두운 옷을 입은 화가 어머니의 모습이 밝게 빛나는 배경에서 돋보이며 실루엣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조명이 가끔씩 작품 감상을 방해한다. 얼굴 자세히 감상 하세요.
오스카 코코슈카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1900년대 비엔나 예술가들의 초상화가이자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비엔나 예술 전람회’(1908)에서 코코슈카는 ‘야수 중의 야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칠고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코코슈카는 인물화에서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1차 세계대전으로 불안해진 인간의 심리를 묘사했습니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대중의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녀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5/0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비엔나 예술공예학교의 학생 시절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옷을 입지 않은 어린 소녀가 벽에 기대어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다양한 갈색을 조화롭게 사용했으며, 코코슈카 특유의 표현주의 화풍이 드러나기 이전 전통 화법을 보여 준다.
목화솜 따는 소녀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요제프 호프만의 제안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윤곽선, 음영이 없는 색면의 사용, 두꺼운 서체 등은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포스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이 포스터는 루돌프 칼바흐가 디자인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또 다른 포스터와 매우 비슷한 양식이다. 코코슈카와 칼바흐는 비슷한 시기에 비엔나 예술공예학교에서 공부했으므로 동료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피에타
연극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을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9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공포영화와 같은 이 충격적인 그림은 오스카 코코슈카가 직접 극본을 쓴 연극'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의 홍보 포스터입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런 포스터를 그린 걸까요? 이 연극은 남자와 여자의 파괴적인 사랑과 갈등을 주제로 합니다. 강렬하고 파괴적으로 과장된 포스터는 남녀 관계의 고통스러움과 혼란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이번 전시가 주목하는 '6명의 꿈꾸는 계술가들'중 네 번째로 만나볼 인물입니다. 그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교류하며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작업하기도 했지만, 곧 자신의 색깔을 찾아 표현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는 작품을 하게 됩니다. 코코슈카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에서 데뷔했고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내면의 심리를 파고드는 독특한 표현법이 돋보이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지평을 넓힌 개척자였습니다
"얼굴 인식" 강연을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1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방금 전에 보신 파괴적인 사랑과 갈등을 그린 연극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예상하셨겠지만 정말 끔찍했습니다. 급기야 오스카 코코슈카에게는 '문제아'라는 별명도 붙었어요. 그리고 몇 년 후 코코슈카는 강연에서 얼굴이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담아내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어요. 전통적인 초상화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만 코슈카는 변화무쌍한 감정과 영혼을 포착해 그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 작품은 그 강연의 홍보 포스터입니다. 이런 코코슈카의 생각은 강연을 듣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불쾌감을 주었습니다. 영혼을 그림으로 그린다니, 심령술사가 할 법한 이야기로 들렸던 것 같아요. 포스터의 남자는 코코슈카 자신을 그린 것입니다. 얼굴로 영혼을 그려낸다고 했으니, 한번 볼까요? 자글자글한 주름과 움뚝 팬 눈으로 그려진 코코슈카의 얼굴은 고통 받는 영혼 그 자체 같네요. 코코슈카는 자신이 비엔나 예술계에서 느낀 고립감을 이렇게 자화상으로 표현했습니다.
양쪽에서 본 화가의 자화상
취리히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코코슈카 전시회를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23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는 1923년 가을, 취리히의 갤러리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자신의 단독 전시회 포스터로 같은 해에 그린 자화상을 활용했다. 왼손에 붓을 들고 관람자를 쳐다보는 그림 속 인물은 예술가이자 개인전을 개최하는 주인공인 코코슈카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 개인전은 코코슈카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넘어 국제적인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코코슈카 작품느낌 너무 좋다.
헤르만 슈바르츠발트 II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캔버스에 유화 브로에르 자선 재단
이 작품의 주인공 헤르만 슈바르츠발트는 아내와 함꼐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들 부부의 아파트는 비엔나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디자인했고, 오스카 코코슈카나 에곤 실레 등 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이들을 재정적으로도 후원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헤르만의 초상화를 2번 그렸습니다.이 작품을 보시면 헤르만이 입은 옷과 뒷배경이 거의 비슷한 색으로 그려져 헤르만의 얼굴과 손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얼굴의 주름과 혈관, 과장된 손가락과 손의 크기는 헤르만의 성격과 내면을 표현하고자 한 코코슈카의 독특한 기법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헤르만의 성격이 어때 보이시나요?
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브로에르 자선 재단
1914년 무렵 오스카 코코슈카는 넓은 붓을 이용해 물감을 두껍고 대담하게 칠했다. 이 작품에서는 어두운 녹청색 배경에 짙은 녹색 양복을 입고 있어 그림 속 주인공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코코슈카는 날카로운 선으로 얼굴 표정을 그렸으며, 얼굴과 마찬가지로 손도 돋보이게 표현했다. 산업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던 폰 바우어는 혁신적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와 친분이 있었다. 당시 코코슈카의 후견인이던 로스가 자연스럽게 폰 바우어에게 코코슈카를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화상
막스 오펜하이머 (1885–1954)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슷한 색감의 뒷배경으로 얼굴과 손을 강조한 것은 앞서 보았던 코코슈카의 인물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작품은 막스 오펜하이머의 자화상입니다.오펜하이머와 코코슈카는 비슷한 시기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으며, 동료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림 속 오펜하이머는 미간을 찡그린 의심 많은 눈빛으로 우리의 시선을 살짝 피하고 있네요. 길게 왜곡되고 칼라비틀어진 것 같은 오펜하이머의 손은 마치 고통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자화상은 오펜하이머가 주요 전시회에 모두 출품했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펜하이머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독일과 스위스에서도 활동하며 인물화로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탐구했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2관에는 사진과 같이 앉아서 휴식과 함께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대략 여기까지 한 시간 반이 조금 덜 걸렸는데요.
휴식하면서 다음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에너지를 모아보는 것도...
리하르트 게르스틀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훨씬 앞서서 표현주의의 길을 개척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전통적인 화법을 거의 구사하지 않았고,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독자적으로 활동한 게르스틀은 시대에 앞선 예술 양식을 선보였습니다. 게르스틀은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창시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깊이 교류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도전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르스틀이 후기에 그린 초상화들은 세부 묘사 없이 인물의 형태만 남긴 추상화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당시에는 예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문을 연 선구자였습니다.
스마라그다 베르크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6/07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섞지 않고 점을 찍어 표현하는 점묘법을 활용했는데, 도란색과 보라색이 주로 사용됐습니다. 게르스틀이 그린 이 여인은 피아니스트 스마라그다 베르크로, 20세기 초 표현주의 음악가로 유명한 알반 베르크의 여동생입니다.
알반 베르크는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함께 어울렸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친구들 중 하나입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12음기법이라는 새로운 작곡 방식을 만드는 등 현대 음악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게르스틀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던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예술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 잔잔한 인물화는 게르스틀의 초기 양식을 보여줍니다
반신 누드의 자화상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2/0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침착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의 머리 주변은 밝은 색으로 그려져 마치 후광이 빛나는 것 같습니다. 손과 같은 신체의 다른 부분은 비교적 간단하게 그려졌지만, 얼굴만큼은 깊은 인상을 남길 만큼 강렬합니다. 남자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는 것 같지만, 우리 너머의 더 먼 곳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림 속 이 남자는 리하르트 게르스틀입니다. 그는 현재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자이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앞섭니다 그는 1908년, 25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게르스틀은 비엔나 분리파와 같은 단체에 속하지 않았지만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찾아나갔습니다. 그의 후기작들은 세부 묘사 없이 형상만을 남겨 추상화에 가까웠을 정도였습니다.
게르스틀은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시대를 앞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평가됩니다
5부. 선의 파격, 젊은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
20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이제 누구보다 솔직하게 인간을 탐구하고 그려냈던 예술가, 에곤 실레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의 가장 대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아마도 유일하게 긴 줄을 서야만 작품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물감과 불투명한 물감 레오폴트미술관
6명의 꿈꾸는 예술가들' 중 마지막으로 만나볼 인물은 바로 에곤 실레입니다. 그는 '인간'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접근한 예술가입니다. 에곤 실레는 죽음에 대한 공포,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표현했는데요, 이제부터 그가 그려낸 작품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곤 실레는 20세기 초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그 어떤 화가보다도 자신의 얼굴과 몸, 그리고 성격에 대해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가 남긴 100점이 넘는 자화상과 4천점이 넘는 밑그림에서 그가 얼마나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깔끔한 흰색을 배경으로 검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실레의 옆에는 꽈리 열매가 강렬한 붉은 색으로 그려져 좌우의 균형과 조화로움을 유지합니다. 에곤 실레는 어깨를 비틀고 우리는 살짝 내려다보고 있네요. 그의 전성기에 그려진 만큼, 예술가로서의 자신감이 눈빛으로 드러납니다. 끊어질 듯 섬세하게 이어지는 선의 표현은 그만의 독창적인 특징입니다. 그의 예민한 성격과 예술가로서의 완벽주의도 잘 드러납니다
소녀의 초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6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목탄 레오폴트미술관
1906년, 열여섯 살의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의 미술 학교인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보수적인 체제와 교수법에 반발해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이 작품은 그가 드로잉에 얼마나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긴 머리를 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E. 와 H. H. 컬렉션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는 에곤 실레의 자화상이다. 강한 빛을 받아 밝게 표현된 왼쪽 얼굴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빛은 실레의 이마, 뺨, 턱으로 쏟아지며 얼굴의 특징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게 드러낸다. 다양한 채도의 갈색과 보라색으로 칠해진 머리카락은 개성 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자화상은 실레 자신을 깊이 있게 표현하면서도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에곤 실레
철도회사 역장이었던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두 살 때부터 색연필과 종이를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삼촌의 도움으로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실망했고, 평생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실레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전시회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접했습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지만 곧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인물을 표현하는 실레의 독특한 선과 뒤틀린 몸은 곧 그의 화풍으로 자리 잡았고 비엔나 예술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자신만의 선과 색채로 풀어낸 방식은 에곤 실레를 세기 전환기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스로를 보는 이 II (죽음과 인간)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 자신을 경영 잃어버리고야 말 것 같은 '정체성의 위기'를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는 정말, 불안하고 나약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림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다른 나'의 유령 같은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원래 나눠질 수 없는 자아가 분리되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창백하게 표현된 유령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유령이 주인공의 어깨를 감싸고 있어, 공포에 떨고 있는 것 같아요. 실레는 어두운 색깔과 날카로운 선으로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과 불안감을 생생하게 표현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아래에서 올라온 매우 크게 그려진 손인데요, 처음에는 주인공의 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이 손은 주인공의 것도, 유령의 것도 아닙니다. 게곤 실레에게 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술가에게 손은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도구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더없어서는 안 될 '나 자신, 그 자체'입니다. 정체성의 위기와 죽음을 앞둔 공포, 에곤 실레는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걸까요? 죽음으로써 예술가의 삶이 끝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계시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편지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어요. 그만큼 애정이 컸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편지의 내용을 읽어 드릴께요. 작품에 담긴 의도를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위대한 인물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림은 스스로 빛을 발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빛을 평생 소비하며 살아간다. 빛이 모두 소진되면 그들은 더 이상 빛나지 못하게 된다. 뒤돌아선 사람은 위대한 인물에 매혹되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보는 위대한 존재들에게 무릎을 끓고 경의를 표하고 있다. 위대한 존재가 발하는 빛은 다양하고 신비로운 색으로 표현됐다. 무릎을 끓은 작은 사람은 크게 빛나는 위대한 존재와 합쳐져 하나가 되고 있다. 이것이 내가 그린 그림 <계시>에 대한 설명이다.
예술가라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
에곤 실레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뒤틀린 몸과 해골 같은 얼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은 인간의 죽음,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끝나버리는 순간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레는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을 정도로 자신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거울에 비춰 보며 다양한 자세와 구도를 연구했습니다. 실레의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을 그린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에곤 실레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주는 주제였습니다.
뒤틀린 자세의 누드 자화상
장식이 있는 가운을 입은 누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9년 종이에 연필과 색분필 레오폴트미술관
한쪽으로 몸을 돌려 정확히 관람자를 바라보는 자화상이다. 실레의 작품에서 보이는 독특한 선의 표현은 인물의 연약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어깨 너머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긴장감이 감돈다. 실레가 걸친 빨간 장식 가운이 팔에서 흘러내려 벗은 몸의 일부만을 가리고 있다. 배경을 비워 인물에게만 집중하게 만든 구도로 인해 실레의 독창적인 화풍과 강렬한 인체 표현이 더욱 돋보인다.
에곤실레를 위한 마지막 공간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마지막 공간인 5부 공간은 에곤실레를 위한 공간 입니다. 이번 전시회를 주관하는 레오폴트미술관이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5부에서 1~4부까지 아쉬웠던 부분이 한 번에 해결됩니다.
남성의 반신 누드 뒷모습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1910년 무렵 에곤 실레는 누드와 자화상을 중심으로 작업했고 훨씬 성숙한 표현주의 화법을 선보였다. 실레는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가며 자세를 연구했다. 이 반신 누드의 남성 역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빠르고 강한 선으로 그린 남성의 깡마른 몸은 과장된 비례와 비틀린 자세로 실레 특유의 인체 표현을 보여 준다.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으로 옅게 칠해진 몸과 굽은 손의 색감은 과장된 표현을 강조한다.
시인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밑그림 없이 빠른 붓질로 그린 이 작품에서 에곤 실레는 자신을 뒤틀린 자세를 한 시인으로 표현했다. 어색할 정도로 심하게 왼쪽으로 꺾여 있는 실레의 머리는 뒤쪽 흰색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눈썹을 치켜뜬 의심에 찬 눈초리는 옆을 향하고 있다. 창백해 보이는 몸에 검은색 윗옷만을 걸친 실레는 어두운 배경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손목을 살짝 잡고 있는 왼손 아래로, 배꼽과 성기를 붉은색으로 그렸다.
어머니와 아이, 모성에 대한 갈망
1904년 새해 전날,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한 후, 당시 14세였던 에곤 실레는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실레의 어머니는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정착하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많은 갈등을 겪었고, 따뜻한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고, 동시에 여동생 게르트루드와의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실레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관계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결합한 것입니다. 죽음은 실레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재작업: 프리츠 보트루바 (1907–1975)
디자인: 1917년경, 재제작: 1965년 인조석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가 자기 얼굴을 조각한 매우 독특하고 유일한 자화상이다.
실레는 숱이 많은 머리를 뒤로 빗어 넘겼고,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다. 조각에 관심이 많았던 실레는 오귀스트 로댕 같은 조각가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17년 처음 만든 이 자화상 조각에 대한 실레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작품은 1965년 주조한 일곱 점의 청동 조각 가운데 하나다.
어머니와 두 아이
에곤 실레 (1890–1918) 1915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5살 때 사망했고, 어머니는 미술을 배우고 싶은 실레를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애정을 느껴보지 못한 실레는 불안한 관계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피에타'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온몸을 녹색 천으로 감싼 어머니가 두 아이를 안고 있어, 에곤 실레가 '피에타'의 구도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외 아들의 얼굴은 죽은 듯 해골처럼 창백하게 그려졌고, 원작의 피에타'의 구도에 존재하지 않는 어린 아이가 공중에 떠 있습니다.이 어린 아이는 색색의 줄무늬 옷을 입고 죽은 듯한 어머니와 다른 아이를 절망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었던 에곤 실레의 복잡한 감정들이 작품 곳곳에 표현돼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아이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은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이 작품은 성화인 성모자상을 연상시킨다. 공간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배경 앞에 어머니와 아이가 두꺼운 붓질로 그려져 있다. 두 사람의 머리는 서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점잖은 표정으로 아이를 보고 있으나, 아이는 반짝이는 눈을 크게 뜨고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이의 손은 어머니와 아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상징한다.
애도하는 여성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어두운 천으로 머리를 감싼 여인의 얼굴과 창백한 피부는 마치 해골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머리 뒤로 또 다른 인물의 얼굴이 살짝 드러난다. 눈썹을 치켜뜨고 입을 꼭 다문 채 관람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인물은 실레가 자신을 표현하던 방식과 비슷하다. 실레는 인물화에서 종종 두 개의 얼굴이나 다른 신체 부위를 사용해 인물 내면의 갈등, 분열된 정체성과 같은 어두운 감정을 드러냈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 심리를 깊이 탐구한 실레가 이중적인 감정이나 복잡한 내면을 다루던 방법이었다.
천을 두른 여성의 뒷모습
<개종 II>의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의 원작인 <개종 Ⅱ>에는 가운데서 설교하는 인물을 열두 사람이 둘러싸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지만, 현재는 사라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종교적 상징을 담은 <개종 II>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주제로 하여 영적 각성이나 내적 갈등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깨에 천을 두른 여성의 비틀거리는 듯한 뒷모습에서 고독과 불안함이 느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나무 (겨울나무)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캔버스에 연필과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바람에 휩쓸린 앙상한 나무가 하늘로 뻗어 있습니다. 꼭 나뭇가지가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잘 보면 나무의 기둥부분이 하늘과 같은 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마치 기둥을 잃은 나뭇가지가 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합니다.고립된 외로움과 동시에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전시회에 출품됐을 때, 한 미술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의 죽어가는 자연이 가지는 특별한 분위기의 마법과 같다. 에곤 실레는 잎이 없는 앙상한 나못가지로 생명을 그렸다' 이렇듯 에곤 실레는 풍경화 속 자연을 인간이 느꼈을 법한 감정을 넣어 의인화하여 표현했습니다. 자서전과 같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실과 고립을 그린 검은 풍경화
에곤 실레는 마치 사람을 그리듯 도시와 자연 풍경에 감정을 담아냈습니다. 풍경은 예술가의 내면 심리와 감정을 나타내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기묘하게 뒤틀리고 어두운 도시나 강변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서 우리는 실레의 고뇌와 시대적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레는 인간의 상실감과 고립, 정서적 불안감을 검은 풍경화로 그렸습니다. 특히 자신이 보았던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유롭게 다시 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블타바강 가의 크루마우 (작은 마을 IV)
에곤 실레 (1890–1918) 1914년 캔버스에 유화, 검은 분필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시선으로 크루마우의 슐로스베르크 언덕 건너편 마을 풍경을 그렸다. 마을 집들을 노란색, 흰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표현했는데, 실레가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그린 건물들에서는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물과 지붕은 대체로 어두워 실레가 도시 풍경에서 반복적으로 보여 준 고독과 소외감이 묻어난다.
작은마을 III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색색의 집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곳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물과 길, 집의 지붕이 모두 어두운 색으로 그려져 전반적으로 암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에곤 실레는 기묘하게 뒤틀린 검은 도시 속에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담아냈습니다. 그는 창의적이지 못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안에서 고립된 자신이 느낀 불안감을 검은 도시 풍경화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체코의 체스키 크룸로프인 남부 보헤미아 지역의 중세 마을을 그린 것입니다. 실레는 이 지역에 살면서 여러 점의 도시 풍경화를 그렸지만, 마을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본 도시의 모습을 자유롭게 재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도시에서 머물며 느낀 소외감을 생명력을 잃은 죽은 도시처럼 검은색으로 그려낸 실레만의 표현법이 돋보입니다.
클림트와 실레의 누드 드로잉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각각 4,000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 많은 부분이 누드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누드를 표현한 방식과 목적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클림트는 누드 드로잉에서 여성의 몸에 담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은 섬세한 선과 세밀한 묘사가 특징인데 부드러운 곡선으로 여성의 매력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실레의 드로잉은 현실적이고 과감합니다. 그는 왜곡된 인체와 뒤틀린 자세를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해 인간의 고독과 불안, 그 속에서 움트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도발적인 드로잉은 곧 실레 그림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에서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공간 중 하나...
오른쪽에서 본 여성의 상반신 누드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16년경 일본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4천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많은 작품이 누드일 정도였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흔히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의 중심어 성적 욕망이 있고, 이로 인해 정신적 갈등이 일어난다고 분석했습니다. 클림트와 실레는 인간의 본능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에 대한 접근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클림트의 드로잉을 보시면, 독특한 코, 도톰한 아랫입술 우울한 분위기의 눈 등 섬세한 얼굴 표현이 돋보입니다. 클림트는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여성의 매력을 표현하면서도 장식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아름답고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죠. 클림트가 보여주는 드로잉은 섬세하면서 절제된 표현이 특징입니다
왼쪽에서 본, 다리를 올리고 있는 여성의 반신 누드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17년 일본 종이에 인도 잉크 레오폴트미술관
클림트는 여인이 침대에 푹 파묻힌 느낌을 주기 위해 길고 날씬한 비율을 강조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정리된 윤곽선 대신 불규칙하게 겹친 선들을 사용하여 불안한 느낌을 준다. 거칠게 떨리는 선은 익숙하지 않은 펜과 잉크로 그렸기 때문이지만, 클림트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작품은 형태를 간략하게 암시하듯 그리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드러낸 클림트 말년의 경향을 잘 보여 준다.
클림트의 누드 스케치를 감상했다면, 반대편 공간은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같은 듯 전혀 다른...
팔이 올라간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검은 분필 레오폴트미술관
이 그림은 여성의 머리, 팔, 몸통을 본 대로 빠르게 스케치한 듯하지만, 양팔의 평행선이 방해받지 않도록 턱 부분을 생략하는 등 실레가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곳 위주로 그려졌다. 실레의 초기 작품들은 장식적인 표현을 추구했으나, 이 시기에는 몸의 구조에 집중했다. 팔과 몸통의 윤곽선이 해부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팔을 들어 올린 몸의 안정적인 구조에 중점을 두고 표현했다.
올라간 속옷을 입고 누워 있는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5년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에서 실레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이러한 방식을 시도한 시기는 짧았지만 실레는 독특한 양식을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는 여인의 말려 올라간 속옷을 아무렇게나 낙서하듯 그렸다. 모델의 머리는 소용돌이 같은 선으로, 얼굴은 반원 등 간략한 선으로 그려 마치 인형을 보는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리던 1915년 무렵, 실레는 개성 있는 얼굴 대신 개인의 특징을 생략한 기하학적 형태로 인물을 표현했다. 실레의 특징이던 ‘말하는 듯한 눈’도 텅 빈 구멍처럼 묘사했다.
파란 스타킹을 신고 앞으로 몸을 숙인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연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을 보면, 척추와 근육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여성이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습니다. 몸을 표현한 섬세한 선과 부분적으로 칠해진 색은 이 여성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매우 힘들어 보이지만, 섬세한 구도로 안정적인 자세를 만들어낸 것이 신기하네요. 그만큼 이 여인이 느끼고 있는 고통과 고뇌를 표현하기 위한 실레의 고민이 느껴집니다.
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꿇은 여성 (발리 노이칠)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검은 분필, 수채,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이 여인은 에곤 실레의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칠입니다.
그녀는 에곤 실레의 모델이었고 그의 많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 나오는 붉은 머리의 여성은 대부분 발리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수줍은 듯 당찬 얼굴의 발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회색 가운의 주름이 세밀하게 표현됐고, 특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이 강조되어 안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실레와 발리는 생활고를 겪으며 여러 지역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실레는 1914년 정착한 곳에서 만난 중산층 집안의 여성과 결혼을 결심합니다. 결국 발리는 에곤 실레를 떠나게 됩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의 마지막 공간입니다.
에곤실레의 작품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의 에로티시즘 작품이 빠질 수 없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누드 작품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불안함에서 안정감으로, 달라진 누드
에곤 실레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특히 경력 초기에 생활고에 시달리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과 연인 관계였으며, 그녀는 주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실레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했던 실레는 결국 발리와 결별하고, 1915년 이웃으로 만난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를 만나 결혼 했습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품으로 실레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에곤 실레는 누드에서 주로 마르고 긴장된 모습으로 내면의 불안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실레가 그린 인물들은 대체로 풍만하고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아내 에디트를 만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실레의 감정이 반영된 걸까요? 인물의 모습은 변화되었지만, 생명력을 강조하고 심리적 주제들을 탐구한 그의 예술 세계는 한결같아 보입니다.
누워 있는 여성
에곤 실레 (1890–1918) 1917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에게 누드는 단순한 육체의 묘사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인 욕망과 고독을 대하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안정된 정착 생활을 원했던 에곤 실레는 1915년 중산층 가정의 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습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격이었고, 그것은 오랜 시간 실레가 원했던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민하고 불안정했던 실레의 예술가적 성향과 달리 유복한 환경과 온화함을 가졌던 에디트의 성격은 실레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바로 실레의 아내, 에디트입니다. 양팔을 위로 올려 머리를 받친 팔의 자세와 넓게 벌린 다리가 가로로 긴 작품에서 대칭을 이룹니다. 실레는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있는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실레의 후기 작품에서는 이전의 깡마른 모습과 다른 풍만한 여성의 누드가 그려졌습니다. 결혼 이후 심리적으로 안정된 실레가 임신한 에디트를 보며 느낀 감정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1918년 유럽을 덮쳤던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 에디트는 아들을 임신한 상태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에곤 실레도 세상을 떠납니다
서 있는 세 여성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8년 (미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에곤 실레가 생을 마감하자 미완성으로 남게 된 작품이다. 세 여성은 모두 다른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다. 옆으로 몸을 돌린 가장 왼쪽의 여성은 무언가 이미 체념한 표정이다. 가운데 여성은 눈을 크게 뜨고 침착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여성에게 기댄 오른쪽 여성은 긴장을 풀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이 작품은 실레가 말년에 보였던 새로운 회화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에필로그/ 예술에는 자유를
전통의 벽을 넘어 새로운 양식에 도전하며 예술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그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이끈 선구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났던 ‘꿈꾸는 예술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가 오스트리아 예술에 심은 ‘도전과 실험’이라는 나무는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유’라는 열매를 선물했습니다.
그들의 도전과 실험은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끌었고, 자유를 꿈꿨던 예술가들은 ‘비엔나 1900년’의 선구자가 됐습니다. 전통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했던 이들의 시대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오늘 소개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는 얼리버드 티켓팅 이후 너무나 기다리던 전시회 였는데요. 에곤 실레의 다양한 여러 원작들을 만나본 부분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클림트는 약간 사기당한 느낌이 드네요. 제가 아는 클림트의 작품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작품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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