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한국 현대조각에서 테라코타와 석고 마스크 작업을 중심으로 인간의 내면을 조용하고 절제된 형상으로 표현한 작가 권진규의 유족들이 기증한 작품들이 2023년 오늘 소개하는 이곳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에 '권진규의 영원한 집' 이름으로 상설전시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현대 미술을 이야기 한다면 조각가 권진규 작품이 빠질 수 없는데요. 특히 그의 테라코타 작품은 미술을 사람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 권진규의 영원한 집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설전시 '권진규의 영원한 집'을 상설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는 도쿄 무사시노미술학교 시기의 '새로운 조각', '오기노 도모', '동등한 인체'와 서울 아틀리에 시기의 '내면', '영감', '인연', '귀의' 등 7개 소주제에 맞춘 작품과 자료로 구성돼 그의 작업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데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작가 권진규, 작품과 함께 이곳에서 영원히 함께하시길...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1층 7개의 공간에서 조각가 권진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전시개요

2021년 7월, (사)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은 많은 분들이 권진규 작가의 작업을 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141점을 기증했습니다. 이번 기증에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조각, 소조, 부조, 드로잉, 유화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1950년대 주요 작품이 다수 포함된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닙니다.

2023년 미술관은 작가의 50주기를 맞아, 벨기에영사관이었던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의 다섯 전시실을 권진규 상설전시 공간으로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권진규가 말한 진정한 작품이란 주변 대상을 꾸준히 관찰하고 연구해 그 본질만을 담아내는 것이었으며, 그가 추구한 것은 사실적 묘사보다 사라지지 않는 영혼과 영원성이었습니다. 그는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 현세와 내세,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결국 이를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모더니티를 구축했습니다.


그가 남긴 "진실의 힘의 함수관계는 역사가 풀이한다."라는 말처럼, 오늘날 제약이 거의 없는 동시대 미술 환경에서 그의 작품은 새롭게 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미술관은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상설전시 '권진규의 영원한 집'을 마련했습니다. 전시는 도쿄 무사시노미술학교 시기의 '새로운 조각', '오기노 도모', '동등한 인체', 그리고 서울 아틀리에 시기의 '내면', '영감', '인연', '귀의' 등 일곱 개 소주제로 구성해 작가의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앱을 다운로드 받으시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회 오디오가이드 이용 가능합니다.

새로운 조각 New Sculpture

권진규는 1953년 3월 무사시노미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연구과에 남아 작업을 이어갔으며, 같은 해 니카회가 주최한 제38회 니카전에 말 조각 세 점을 출품했습니다. 니카회는 1914년 문전 미술전의 서양화부에 반발한 신진 작가들이 결성한 단체로, 유파와 관계없이 새로운 가치를 존중하고 창작의 자유를 지향하며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조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조각에서 드물게 사용되던 돌을 선택해 육면체의 구조를 유지한 채 각 면을 서로 다른 깊이와 형태로 조각한 '기사'(1953), '마두 B'(1953) 등을 선보여 특대특취를 수상했습니다. 이는 니카회의 설립 취지에 부합하는 자유로운 조형 실험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학교에서 석조와 테라코타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뛰어난 솜씨로 동료와 후배들에게 존경받았고, 일본 미술계에서도 빠르게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기사騎士'(1953)는

제38회 니카전에서 특대를 받은 작품으로, 겉보기에는 직육면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말 위에 올라탄 기사의 팔·다리·머리가 정면에서 드러납니다. 반대편 면에는 말머리와 연결된 기사의 신체가 표현되어 있으며, 앞면은 말머리, 뒷면은 기사의 등이 보이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말머리에서 갈기, 그리고 기사의 머리로 이어지는 흐름이 나타나며, 다섯 면 모두가 서로 다르게 조각되어 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줍니다. 동물의 형태는 단순하게 처리되었지만 고부조로 표현된 기사와 저부조의 말머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으며, 세부 표현을 줄이고 돌의 질감을 살려 원시적 분위기가 강조됩니다.

 

 

권진규의 작품 중에서는 말 조각작품이 많이 있는데요. 오늘 소개하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회에서도 조각가 권진규 말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이런 모양의 작품은 또 새롭네요.

 

권진규의 말 드로잉...

 

이 권진규의 말 작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는 권진규 작품 3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권진규 작품을 소장한다고 했을 때 작가가 매우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권진규의 말 작품은 아래 지난 포스팅 참고하세요.

 

'지천명에 화답하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개관 50주년 전시회 (B1F ~ 1F)

주말에 지인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려대학교하는 곳을 가보네요. 항상 새로운 대락교를 방문하면 해당 대학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보는게 취미인데, 이번에는 운

www.a4b4.co.kr

 

오기노 도모 荻野トモ Domo Ogino

조각가 권진규는 1951년, 3학년 때 같은 아틀리에에서 실기 수업을 받던 서양화과 2학년 오기노 도모에게 모델을 부탁했다. 그가 <도모>(1951)를 제작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교제를 시작했다. 그는 1952년부터 여름이면 도모의 본가 근처 산장에 머물며 점토 작품과 목조불상을 제작했다. 도모의 부모는 그의 불상을 미술관에 팔아 주기도 했다. 그는 1954년 영화세트 제작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까지 도모의 부엌 소득으로 생활했다. 1955년 여름에는 도모의 본가 근처에서 가마에 기와를 굽는 것을 보고 테라코타를 시작했다. 이때 그는 도모 아버지의 부탁으로 목조 공양상을, 본인 작품으로 <나부裸婦>(1955) 등을 제작했다.


1959년, 그는 어머니의 병세 악화로 귀국을 결심했는데, 한일수교 전이라 도모와 혼인신고만 하고 홀로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이유인지 도모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1965년 도모의 부모가 보낸 이혼서류에 동의했다. 결국 둘은 헤어졌지만 권진규에게 도모는 훌륭한 모델이었고 예술적 교감과 생계를 나누었던 동료이자 연인으로 그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모'(1951)는

작가가 일본 유학 시절 만난 후배 도모를 모델로 만든 두상으로, 당시 사진과 비교하면 도모의 얼굴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좌우 대칭을 엄격히 맞춘 구도이며, 얼굴 중심에는 석고 뜨기 과정에서 사용된 쪼갬 볼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테라코타임에도 브론즈처럼 채색한 점도 눈에 띄는 특징입니다.


1959년 어머니 병환 소식을 듣고 작가가 급히 귀국하면서 이 작품은 오랫동안 도모가 보관하고 있었고, 도모가 세상을 떠난 뒤 재혼한 그녀의 남편 가사이 세고가 가진 것을 권경숙 선생이 다시 구입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나부'(1955)는 

작가가 일본에서 머물던 1955년 여름부터 가을 사이, '여성입상'·'보살입상'과 함께 목조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연인이던 도모의 아버지로부터 공양상 제작을 부탁받으며, 머물던 곳 근처 배나무 밭에서 얻은 나무로 작업했습니다. '여성입상'이 주문 작품답게 매끈하게 다듬어진 것과 달리, '나부'는 아프리카 원시 조각을 떠올리게 할 만큼 얼굴과 머리 형태가 거친 편입니다.

왼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며, 시선도 정면이 아니라 다리가 향한 왼쪽으로 돌려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작업 과정에서 코는 떨어져 나갔으나 조각도의 결이 남은 얼굴, 격자 형태로 새긴 구불거리는 머리 모양 등에서 당시 작가의 진지한 태도와 집중이 잘 느껴집니다.

 

내면 Inner World

조각가 권진규는 여느 작가들처럼 자신의 얼굴을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자화상, 자소상, 자각상 등을 남겼다. 뛰어난 작품은 집요한 자아 탐구와 자아 성찰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의 자소상 또는 자각상 형태는 마스크, 두상, 흉상 등으로, 재료 역시 테라코타, 나무, 석고, 건칠 등으로 다양하다. 1950년대 자화상은 골격에 대한 그의 정확한 이해를 보여준다. 1958년 제4회 이치요오회—陽會 미술전람회에서 이치요오상—陽賞을 수상한 테라코타 <두상>(1958년경)은 부드러운 인상과 그윽한 눈빛을 갖고 있는데, 부르델의 작품처럼 석고 틀에서 흙을 제거할 때 생긴 선이 그대로 남아있다.

 

테라코타 <자소상>(1968) 역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힐 만큼 정제된 표현, 응축된 내면세계로 서슬이 푸르다. 그러나 1970년대 자소상은 세 번째 개인전에 대한 저조한 반응, 동상제작과 해외전시의 무산, 건강 악화 등 그가 처한 여러 악재를 반영한 듯 고뇌에 차 있다. 이들은 시기별로 양식과 표현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권진규의 개인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내면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전시장 중앙에는 작가의 사진과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비록 생을 자살로 마감한 짧은 생이었지만 그의 불꽃같은 인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권진규의 일본인 부인 도모. 왜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그녀를 버렸을까?

 

'자소상'(1960년대)은 

정면을 응시하는 큰 눈과 굳게 다문 입술 등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얼굴을 마스크 형태로 재현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자신의 얼굴을 마스크로 만들어 왔으며, 이 작품은 넓은 이마와 뒤가 뚫린 구조가 특징입니다. 찌푸린 양미간은 당시 작가가 겪던 내적 갈등과 현실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여러 자소상을 남긴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작품들에는 이처럼 삶을 성찰하는 태도와 더불어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감,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가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권진규 마스크 

무언가 느낌이 다르다고 했느데,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뒷면, 작품이 이렇게 관리되고 있었구나...

 

동등한 인체 Equal Body

조각가 권진규는 일본에서 남성상과 여성상을 많이 제작했고, 졸업작품으로 둔신대의 <나부裸婦>(1953)를 제작했다. 현존하는 남성 나상裸像으로 <남성입상>(1953년경)은 부르델에서 시미즈로 이어지는 인체의 사실적 구조와 섬세한 근육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연구과에서도 여성상을 꾸준히 제작했다. <나부>(1953–54)는 두 다리를 땅에 단단하게 딛고 선 당당한 자세가 인상적이다. <여성입상>(1954)은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신체 각 부분이 조금씩 틀어져 자연스러우며, 석고의 거친 질감과 어두운 채색이 눈에 띈다.

 

웅크린 아프로디테 Aphrodite accroupie>를 모본으로 한 <나부>(1954)는 섬세한 근육이 돋보인다. 네 개의 나상은 남녀의 신체적 차이보다 인체의 공통적인 구조와 질감을 강조한 작품이다. 이후 그는 1968년 일본 개인전을 위해 다양한 동작의 작은 나부상을 많이 제작했다. 당시 일본 조각가들이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강조한 관능적인 여성상을 만들었다면, 그는 생명력을 강조한 강건한 여성상을 만들었다. 권진규는 작품을 통해 구조와 본질을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남성상과 여성상에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

 

'남성입상'(1953년경, 사후제작)은

작가가 일본 유학 시절 만든 브론즈 작품을 다시 브론즈로 재제작한 것으로, 1950년대 초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익힌 조각 기법과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동작은 단순하지만 거칠게 처리된 표면에서 작가 특유의 감정이 드러나며, 고개를 숙인 사색적 표정과 길게 변형된 인체는 작가의 고독한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두 팔을 생략하고 머리를 작고 단순하게 표현해 전체적으로 수직적 긴장감이 강조되었으며, 비록 초기작이지만 인체 연구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작은 조각상이지만 질감이나 느낌이 상당히 강한...나는 3번째 작품이 가장 느낌이 좋다.

 

나부'(1953–54)는 

머리를 뒤로 올린 채 두 팔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선 여성 나상으로, 두 발을 벌리고 몸의 중심을 왼쪽에 두어 오른쪽 어깨가 올라가고 왼쪽 다리가 거의 수직에 놓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쇄골의 높이 차이, 복근과 대퇴부로 이어지는 근육, 왼쪽 엉덩이에 실린 힘 등은 작가가 인체의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며 충실하게 묘사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재료는 석고에 어두운 색을 올려 테라코타나 브론즈처럼 보이지만, 흙으로 형태를 만들 때의 기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얼굴은 눈·코·입이 조각도로 거칠게 자리 잡혀 있으며, 표면 전체에는 작은 흙 알갱이를 붙여 펴 발랐던 흔적이 남아 작가의 손자국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거칠고 표현적인 질감은 권진규 작품 전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서울아뜰리에

조각가 권진규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38살 이후부터의 활동...

1973년 자살, 나와 같은 시대를 살지 못했구나.

 

영감 Reference

권진규는 3년간 불어를 공부해 부르델의 원서를 독파했을 정도로 그를 좋아했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르델은 서구문명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아케이즘 양식을 근원으로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다. 그 역시 동서양의 고대 유산을 참조한 그만의 강건하고 응축된 형태의 작품으로 변치 않는 본질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동서양의 미술만이 아니라 전통, 문학, 음악, 자연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이 몰두했고, 이를 작품에 유연하게 반영해 새로운 작품을 창조했다.

<춤추는 뱃사람>(1965)은 고대 에게 초기 키클라데스(Cycladic) 문명의 여신상처럼 단순하게 표현된 사람 얼굴과 부르델의 작품처럼 다양한 표면 질감을 가졌다. 1968년 일본 개인전에 출품된 소품 나상은 7월 19일자 『도쿄신문』에서 부르델, 마이올(Aristide Maillol, 1861–1944), 이집트, 그리스 타나그라 조각 등을 흡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앉아 있는 여성>(1972)은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카리아티드(Caryatid)를, <흰 소>(1972)는 이중섭의 <황소>(1953)를 모본으로 했다. 권진규는 다양한 문화를 존중했고, 이를 재해석해 자신만의 작품을 창조했다.

 

'춤추는 뱃사람'(1965)은 

부조 '두 사람'(1964)과 제작 방식과 표현이 비슷한 작품으로, 인체를 매우 단순하게 처리해 얼굴도 코만 표현된 추상적 형태를 보입니다. 작가의 '드로잉 북 3'(1964)에는 초기 키클라데스 문화의 유물과 여인상, 하프 연주자에 대한 메모와 드로잉이 남아 있는데, 이는 에게 문명 초기의 '키클라데스' 조각을 참고해 이 작품과 '두 사람'에 적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응형

여러 면으로 이루어진 구성에서 몸통은 작은 흙덩이를 콩알처럼 하나씩 붙여 만들었고, 배 부분은 직사각형 무늬를 찍어낸 듯한 효과를 줍니다. 바탕은 표면을 섬세하게 긁어 다양한 질감을 만들었는데, 이는 작가가 영향을 받았던 부르델의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완성된 조각들은 각각 구운 뒤 합판 위에 석고와 접착제로 고정해 하나의 화면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서 있는 여성...

'앉아 있는 여성'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머리 옆을 손으로 받친 자세의 작품으로, 작가의 드로잉 북에 남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카리아티드 모사 드로잉에서 그 기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리아티드는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 기둥 역할을 하던 여성상으로, 모딜리아니는 이를 나상 형태로 약 70점 이상 그렸으며, 권진규의 드로잉 북에는 다양한 동작의 여체와 함께 '모딜리아니'라는 글씨가 있어 이 작품의 도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작가의 소형 인체 조각들은 신라 토우부터 서양 근대미술까지 폭넓은 양식을 참고해 만들어졌으며, 그는 다양한 동세를 꾸준히 연구해 이를 풍부한 양감의 조각으로 발전시키셨습니다.

 

멀리서 볼 때 무슨 흙 덩어리가 전시되어 있나 했는데요.

 

작품 제목은 고양이 머리 입니다.

 

김종영 작품에서 느껴지는 천재성... 갖고 싶다.

만약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회 아트샵이 있다면 난 바로 겟...

 

'흰 소'(1972)는

이중섭의 '황소'(1953)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으로, 작가는 1972년 3월 열린 이중섭 15기 유작전을 두 번 방문하며 '황소'와 '흰소' (1954년경)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급히 가지고 있던 '황순원 전집' 2권 안쪽에 이 그림들을 스케치했는데, 우연히 그 책에는 '황소들'이라는 단편도 실려 있었습니다.

권진규는 이중섭뿐 아니라 김환기, 박수근의 작품도 자주 칭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족에 따르면 '흰 소'(1972)는 매우 빠른 속도로 완성되었으나, 이중섭의 소처럼 생동감과 힘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특히 생전 마지막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큽니다.

 

정말로 느낌 좋다. 너무 좋다.

 

인연 Nidana

권진규는 1965년 첫 개인전 이후 여성 두상과 흉상을 본격적으로 제작했다. 전시에 감동한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학생 이선자가  아틀리에를 찾아와 조각을 배우고 모델을 서면서 그는 1966년에 <선자>를 다수 제작했고, 선자의 친구들을 대상으로 두상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친척 권옥연이 소개한 유준상이 우선한 여성들과 홍익대학교 제자들을 대상으로 흉상을 제작했다. 그는 작품에 대상의 내적 세계를 담기 위해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을 모델로 삼았고,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입체적인 얼굴을 선호했다. 고대 이집트 미술이 대상을 표현할 때 세부적인 표현보다는 대상의 본질에 집중했던 것처럼, 그의 흉상 역시 정면을 향한 단정한 얼굴, 먼 시선, 앞으로 살짝 뻗은 긴 목, 간결한 흉부로 그 정수를 드러냈다.


1970년대에 그는 기존 테라코타용 석고 틀을 사용해 건칠 여성흉상을 제작했는데, 삼베를 거칠게 붙이고 옻을 어둡게 칠해 같은 틀에서 나온 테라코타 작품보다 더 고양된 정신성을 드러냈다. 권진규가 독자적인 여성상을 구현할 수 있던 것은 개인전을 계기로 인연을 맺고, 그들과 내적 교류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래 두 흉상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니...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회에서 흥미로운 작품 두 점

'경자'는

1967년 홍익대학교 제자 최경자를 모델로 만든 테라코타 조각의 틀을 활용해, 1971년경 다시 건칠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일찍부터 건칠에 관심을 보였고, 1969년 집 근처 부흥교회에서 의뢰받은 그리스도상을 만들며 본격적으로 이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주로 삼베를 사용했는데, 당시 집에 삼베 이불이 많았던 점과 삼베가 오래가고 한국적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그 재질의 특성을 적극 살렸다고 합니다.

'경자'는 마치 삼베가 헤지고 빛이 바랜 듯 보이지만, 이는 건칠 작업의 고유한 질감이며 작가의 의도입니다. 건칠은 천과 옻칠을 재료로 하고 속이 비어 가벼운 기법이지만,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는 오히려 깊고 단단한 내면을 담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예선'은 

신인 소설가 신예선을 모델로 만든 작품입니다. 신예선은 1966년 '에뜨랑제여 그대의 고향은'을 출간했고, 작가님은 이 책을 읽은 뒤 직접 모델을 부탁해 작품을 제작하셨습니다. 그는 권옥연, 김흥수 화백과도 깊이 교류했던 만큼, 당시 권옥연이 두 사람을 연결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후 신예선은 미국으로 이주해 글쓰기를 이어가며 극작가와 음악인 등 여러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영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작가님 역시 그의 문학적 열정과 단단한 내면을 일찍이 이해하고 작품에 담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권진규의 느낌 가득한 경자와 예선의 뒷모습...

 

 

\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권진규가 자살한 1973년 고려대학교 미술관에서는 권진규의 작품 3점을 구입합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된 권진규의 작품은 아래 포스팅에서 확인하세요.

 

지천명에 화답 하다 후기 (3/3) : 조각, 초상화, 민중회화

고려대학교박물관 현대미술전시실 개관 50주년 기념 특별전 전시회인 '지천명知天命에 화답畵答하다 – 시간을 담은 공간, 예술을 담은 시간' 관람후기 입니다. 앞에서 B1F '기획전시실 미술美術

www.a4b4.co.kr

 

 

이분은 예선이다.

728x90

 

조각가 권진규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은 마지막 공간.

귀의 Devotion

권진규는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자라 불교적 세계관을 가졌고, 이는 그의 삶과 작품 전반에 스며들었다. 그는 속리산 법주사 미륵 대불 마무리를 시작으로 꾸준히 불상을 제작했다. 그의 <보살입상>(1955)은 몸은 보살이나 머리는 부처로, 전형적인 도상에 얽매이지  않았고, 이는 1970년대 불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귀국해 순수 지은 아틀리에에서 마치 수행자처럼 작업에 정진했는데, 1960년대에 강건한 동물상, 다양한 참조물을 반영한 부조, 영혼이 깃든 여성 흉상 등으로 고유의 작품세계를 확고히 구축했다.

 

그는 불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제1회 개인전에 <입산>(1964–65)을, 제2회 개인전에 <비구니>, <춘업녀> 등을 출품했다. 1971년 초, 그는 절에서 수양하며 불상을 제작했고,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불교적 세계로의 고뇌 어린 침잠”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해 제3회 개인전에는 건칠 불상 11점을 출품했는데 반응이 저조했다. 이에 바라던 일들이 무산되고 건강까지 악화되자 1973년 5월 권진규는 영원히 사는 작품을 두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권진규 자소상

권진규의 병세가 깊어진 1970년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입산'(1964–65)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일주문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관련 드로잉에 적힌 ‘1964.12. 목조 입산’이라는 기록과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올린 구조로 볼 때 일주문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주문은 세속의 번뇌를 끊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하는데, 이 조각은 작가의 불교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대표작으로 평가됩니다.


작품은 1m가 넘는 큰 규모로, 권진규 작품 가운데 드문 대형 목조 작업입니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한옥의 결구 방식처럼 각 부분을 연결한 점이 특징이며,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와 나뭇결을 살린 우아한 마감은 전통 목조 건축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잘 보여줍니다.

 

불상'(1970년대)은 

시무외인(손바닥을 밖으로 향해 들어 올린 자세, 두려움을 없앤다는 뜻)과 여원인(손바닥을 밖으로 향해 내린 자세, 중생의 바람을  이루어 준다는 의미)의 수인을 함께 표현하려다 미완으로 남은 목조 불상입니다. 얼굴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아 정확한 비례 판단은 어렵지만, 약 5등신에 가까울 만큼 머리가 큰 편입니다.


이 작품은 일본 유학 시기 제작된 '보살입상'(1955)처럼 머리 중앙을 봉긋하게 표현하고 나발을 생략했으며, 작가는 1970년대 불상을 만들 때도 전통적 도상을 엄격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불상 제작 자체를 자기 성찰의 과정이자 독자적 창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얼굴 윤곽은 잡혀 있으나 장신구가 보이지 않고,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함께 사용한 점으로 보아 아미타불과 같은 불입상을 만들려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화강암으로 제작된 불상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회 전시장을 지나 나오면 스케치북과 도록이 전시되어 있고, 지유롭게 열람이 가능합니다.

 

아무생각 없이 스케치북을 펼치다가 혹 진품인 줄 알고 화들짝 놀랐는데.

 

복사본 입니다. 편하게 감상하시면 됩니다.

생각보다 이곳에서 시간 많이 보냈다는...

 

이곳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 전시된 권진규 작가의 작품과는 다른 느낌의 작품들은 이건희 컬렉션에서 만나볼 수 있었는데. 다소 생소한 느낌의 작품은 아래 지난 포스팅 참고하세요.

 

[예약 및 관람 꿀팁]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예매 및 관람후기 입니다. |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예약 꿀팁 참고로 이건의 컬렉션 특별전은 온라인 사전예약으로

www.a4b4.co.kr

 

 

오늘 소개한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매스 '전국광: 쌓는 친구, 허무는 친구' 전시회가 2026.02.22 까지 열리고 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구상조각과 추상조각 대가의 작품을 한 공간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728x90
728x90

개인적으로 강동송파 3대 국물떡볶이 맛집으로 생각하는 방이동먹자골목 맛집 공룡떡볶이 방이본점 방문후기입니다. 오늘은 매장식사가 아닌 포장해서 집에서 먹었는데요. 공룡떡볶이 주차 및 메뉴, 가격정보 공유합니다.

 

| 공룡떡볶이 방이본점 위치 및 휴무일

방이동 국물떡볶이 맛집 공룡떡볶이 위치는 방이동먹자골목 방잇골어린이공원  근처 골목에 있습니다. 처음 오시는 분은 네이버 지도 보시면서 오세요. 차량으로 방문하시면 가게앞이 일방통행로로 되어 있으니 잘 확인하시고 오세요.

방이동 골목떡볶이 휴무일은 2주 4주차 일요일 입니다. 대형마트 휴무일과 동일하니 기억하기 쉽네요.

 

골목떡볶이 방이본점 건물 옆에는 서너대 주차 가능한 주차장이 있는데요. 공룡떡볶이 주차 가능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는 운 좋게 한 자리 비어서 주차장에 주차하고 방문합니다.

 

가게 앞에는 떡볶이와 튀김들이 저를 유혹하고 있네요. 매장 안에는 4개 정도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서 식사도 가능합니다.

 

가게 앞에는 떡볶이와 순대, 어묵 그리고 튀김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공룡떡볶이 메뉴는 꼬마김밥와 공룡볶음밥, 찹쌀순대, 주먹밥, 야채라면 등이 준비되어 있는데요. 보통 가격은 뒤김을 제외하고 5천원 전후 가격입니다.

반응형

저는 시간이 늦어 떡볶이와 튀김 포장해서 갑니다. 떡볶이 1인분과 튀김 10,000원 포장했네요.

 

| 국물떡볶이

공룡떡볶이 방이본점 대표메뉴인 국물떡볶이 1인분 포장입니다. 5,000원 가격에 양이 많다 적다 말하기 어려운 딱 1인분 양...

 

달달한 떡볶이 국물과 밀떡 어묵이 들어 있는데요. 가끔은 국물떡볶이가 생각날때는 이곳 방이동 먹자골목 맛집 골목떡볶이 추천 드립니다. 다만 골목떡볶이 맛의 매력과 특징은 약간 강한 후추맛에 있는데, 오늘은 조금 약하네요.

 

| 공룡떡볶이 튀김

그냥 10,000원 맞춰 포장해 달라고 했는데요. (잘라 달라고 했고요)

새우튀김, 야채튀김, 오징어튀김, 만두튀김, 김말이, 소시지튀김, 메츄리알튀김, 고구마튀김... 최소 8개 확인되네요.

튀김은 기름지지 않고 매우 바삭하네요. 국물떡볶이에 찍어 먹으면... 아이~

 

| 방이동 먹자골목 맛집 골목떡볶이 총평

강동송파 3대 국물떡볶이 맛집으로 임명

국물에 튀김과 꼬마김밥 함께 먹으면 맛있음

집에서 거리는 좀 있지만, 가끔씩 방문하고 싶은 잠실 떡볶이 맛

728x90
728x90

구 벨기에 영사관 건물을 활용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제가 좋아하는 권진규 조각가의 작품과 항상 새로운 기획전도 만나볼 수 있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주차 및 주차장 정보입니다. 

 

박물과는 동작구 사당동 사당역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요. 규모가 협소한 관계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방문객을 위한 주차장은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중교통 이용하시거나 주변 고영주차장을 이용해야 합니다. 물론 유료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사진속 건물이 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입니다. 2개 층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1층 상설전시실에서는 권진규 작가의 작품을 항상 만나볼 수 있고요. 2층 특별전시실에서는 주기적으로 새로운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사진속 공간이 이곳 미술관 공간의 전부입니다. 뒷편 직원용 주차공간 제외하고는 별도 주차장 없습니다.

|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건물 바로 뒷편에는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이 위치해 있습니다 .총 3개 층의 지하 주차장으로 매우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주차장입니다.

 

아래 사진과 같이 오른쪽 건물이 바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건물이고요. 건너편 왼쪽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입니다. 

 

주차장부터 미술관 거리가 100미터가 되지 않아 약 1분만 도보로 이동하면 방문할 수 있어 이곳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주차장으로 추천 드립니다.

 

 

| 주차장 진출입 난이도는 무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지하 주차장으로 주차장 진출입구 난이도는 무난합니다. 주차장 경사가 다소 있네요. 도로폭이 여유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중앙 분리대 없이 입구와 출구과 같아서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상당히 긴장하셔야 합니다.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 커브길은 다소 긴장된다. 얼마전 이런 주차장에서 접촉사고 한번 경험했더니 더욱더 쫄리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주차장으로 추천하는 사당역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은 총 4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층은 관리실과 공개 화장실이 있으며, 주차장은 지하 3층부터 1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 전기차충전소는 지하 1층 주차장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기차 충전공간은 주차여유 있네요.

 

지하 1층 주차장에도 일반 차량 주차공간이 있지만 면수가 많지 않고요. 일반 차량이나 경차는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 지하 2층 또는 3층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주차공간은 상당히 여유 있네요. 시설도 너무나 깨끗하고요. 요즘은 사설주차장 보다 유료 공영주차장 환경이 더 좋은 것 같네요.

반응형

|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 주차요금 및 할인정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주차장으로 추천하는 남현소공원 주차장 주차요금은 5분에 400원입니다. 24시간 연중무휴 유료로 운영되며 한 시간에 4,800원입니다.

 

주차장은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출차시 주차장 1층에 있는 주차요금 정산기에서 사전정산 후 출차하시면됩니다. 현금 사용불가하고 신용카드나 삼성페이 결제 가능합니다.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 애플페이 사용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공영주차장으로 여러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 주차요금 할인이 가능한데요.

특히 전기자동차는 1시간 무료주차가 가능하고 이후 50% 주차요금 할인됩니다. 또한 수소차나 하이브리드 차량, 경차 등 저공해 자동차는 50% 할인됩니다. 

 

오늘은 사당동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주차장으로 추천하는 남현소공원 공영주차장 주차요금 및 소개였습니다. 이곳이 접근성이 가장 좋은 주차공간으로 추천!!!

 

덤으로 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 소개

미술관이 된 구(舊) 벨기에 영사관

대한제국(1897.10.12~1910.8.29.)은 세계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중립국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1901년 벨기에와 한·벨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고, 외교관계를 맺은 벨기에는 1905년 회현동에 새로 영사관을 건립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을사늑약(乙巳條約) 체결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면서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됐다. 벨기에 영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완전히 폐쇄됐고, 이후 이 건물은 오코하마생명보험춘소俣保險(1919)과 기생조합인 ‘본권번차券場’을 거쳐 1944년부터 일본 해군무관부 건물로 사용됐다.

 

1945년 해방 후에는 해군 군악학교, 공군본부, 해군 헌병감실을 거쳐 1968년 구 한국상업은행의 방계기업인 대정흥업에 불하됐다. 이후 사실상 방치됐던 구 벨기에 영사관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11월 사적 제254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1977년 구 벨기에 영사관 터를 포함하는 일대가 재개발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구 벨기에 영사관은 1979년 현 위치로의 이전이 확정됐다.

삼성건축의 정기인과 정순용이 실측 설계와 이축 설계를 했고, 준신성이 공사를 맡아 1980년 3월 19일부터 구 벨기에 영사관을 해체한 뒤 이를 남현동으로 이전, 복원하여 1982년 8월 31일 준공했다. 이축 시 원 모습대로 복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외관은 원 모습을 유지했으나, 실내 공간은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의견에 따라 활용 가치를 높이기 위해 2층 일부 평면을 변경, 작은 실을 통합하면서 현재 모습이 됐다.

은행사옥으로 사용되던 구 벨기에 영사관은 2004년 5월 기업의 문학예술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은행에서 서울특별시에 무상 임대하면서, 그해 9월부터 현재까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현재 1층은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회가 상설로 열리고 있는 공간...

728x90

+ Recent posts